Aloha! 천주교 하와이 한인성당
호놀룰루 교구 마노아, 솔렉 공동체
"Peace be with you"
- Korean Catholic Church of Hawaii -
       
 
성경 매일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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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99
작성자 푸른산
작성일 2014-05-09 (금) 23:37
분 류 성경 매일 묵상
ㆍ조회: 2036      
http://hi.djcatholic.or.kr/cafe/?hawaii.9612.4
“ 2014년 5월 10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
2014년 5월 10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Lord, to whom shall we go?
You have the words of eternal life.
(Jn.6,68)
 
 
 
제1독서 사도 9,31-42
복음 요한 6,60ㄴ-69
 

어떤 회의에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어떤 분이 “저분의 생각은 제 생각과 틀립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맞는 표현일까요? ‘틀립니다.’라는 단어가 아닌, ‘다릅니다.’라는 단어를 써야 맞겠지요.

‘틀리다’라는 말은 ‘셈이나 사실 따위가 그르게 되거나 어긋나다.’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다르다’라는 말은 ‘비교가 되는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아니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틀리다’라는 말에는 어떤 가치 판단이 들어 있지만, ‘다르다’라는 말은 단순히 ‘다름’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실수를 종종 합니다. 물론 국어를 잘못 배워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은연중에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자기 내면에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를 담당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자기편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또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는 것 같다면 아주 자그마한 이유라도 붙여서 그 곁을 떠나려고 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곤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오늘 복음을 보니 이천년 전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지요. 하지만 사실은 떠날 구실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떠나겠다는 결심을 했기에 작은 한 가지로도 충분히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신 진리는 듣기 거북한 것이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부귀영화와는 동떨어진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떠나려는 이들에게 무조건 머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의 숫자가 아니라 그들의 성실함이었으니까요.

베드로는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는 주님의 물음에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자신들의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이 과연 있을 수 있냐는 뜻이지요. 이는 주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주님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뜻을 따르고 싶고, 어떤 때에는 죄라고 말하더라도 세상의 화려함을 쫓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주님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이지요. 그리고 이때 우리들은 아주 작은 이유라도 붙여서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곤 합니다. 마치 이천년 전에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예수님을 떠났던 제자들처럼 말이지요.

저 역시 한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으로 자주 주님을 떠났었음을 반성합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의 고백을 본받아서 이렇게 힘주어 고백해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그러나 부족한 저희가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믿음은 걱정이 시작하는 곳에서 끝나고 걱정은 믿음이 시작하는 곳에서 끝난다(조지 뮬러).



 

다름을 인정하는 방법

다름을 인정하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 중 하나는 바로 귀를 열어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입은 하나인데 귀는 두 개이지요. 말하기보다 듣기를 즐기라는 하느님의 배려이고 뜻인 것입니다. 남의 말을 잘 들으면 어떨까요? 상대를 이해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또한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을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결국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아서 좋습니다.

귀를 열어두는 삶.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입이 두 개가 아니라, 하나로 만드셨음을 기억하면서 말하기보다 듣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오늘을 만들어 보세요. 분명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름아이콘 푸른산
2014-05-09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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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산티아고를 향하는 첫 걸음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간 여러가지 개인적인 사건이 많았음에도 무사히 출발할 수 있도록 돌보아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저희에게 보내주신 몇몇 분들의 특별기도지향은 순례길 내내 봉혼토록 하겠습니다.
며칠 전에 말씀드린대로 오늘 묵상글을 마지막으로 빠다킹 신부님의 묵상글을 올리는 일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어느 분인가가 계속 이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주님 은총 가득한 순례의 길이 될수있기를 기도하고 있으며 많은 분들의 응원기도 부탁드립니다.
   
 
  2898
작성자 푸른산
작성일 2014-05-09 (금) 23:37
분 류 성경 매일 묵상
ㆍ조회: 1821      
http://hi.djcatholic.or.kr/cafe/?hawaii.9611.4
“ 2014년 5월 9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
2014년 5월 9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I have life because of the Father,
so also the one
who feeds on me
will have life because of me.
(Jn.6,57)
 
 
제1독서 사도 9,1-20
복음 요한 6,52-59
 

지난 3일부터 6일까지 저에게 있어서는 황금연휴였지요. 그동안 계속 피곤함이 쌓여서 정말로 힘들었는데, 마침 연휴가 저한테 찾아온 것입니다. 어린이날이라고 해서 제가 챙겨야 할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석가탄신일이라고 해서 절에 갈 이유가 없지요. 그래서 저는 이 기간 동안 잠이나 실컷 자고 기도와 함께 밀린 책이나 읽겠다는 소소한 계획을 세웠지요. 더군다나 나라 전체가 슬픔에 잠겨 있는데 어디 여행을 갈 것이며, 또 누구를 만나서 즐길 분위기도 아니지 않습니까?

연휴 첫날, 정말로 많은 잠을 잔 것 같습니다. 평상시에는 4~5시간밖에 자지 않는데, 자그마치 하루에 8시간 이상을 잤습니다. 기분이 너무나 좋았고, 커다란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연휴 둘째 날도 오랫동안 잠잤습니다. 그리고 일어나는 순간, 괜히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할 것도 많은데, 나의 게으름만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너무나 불편했습니다.

잠이 부족한 사람이 잠을 많이 자면 행복감을 느끼겠지요. 그러나 계속 잠을 많이 잔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커다란 수입을 얻게 되면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계속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지요. 한 순간의 행복은 있을 수 있겠지만, 영원한 행복이란 세상의 것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을 두고서 말다툼이 벌어집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머리로도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해하기 힘들지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을 먹으라고 하다니, 우리가 식인종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또 배려를 해주시지요. 성사 안에서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모셔야만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먹는 행위 안에서 우리의 본성이 그분의 본성과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들을 통해서는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없지만,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과 하나 됨으로 인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매 미사 때 영하는 주님의 몸을 좀 더 거룩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모셔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주님과 더욱 더 일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 힘들다 해도 살다 보면 살아진다. 살다 보면 힘겨움에도 적응이 되는 것이다. 삶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란 없다. 다만 견딜 수 없는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박현욱).



 

그 말이 틀렸음을 증명하도록 하라!

아래의 글은 어떤 책에서 본 글입니다. 교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순간에 감사하지 못하고 교만에 빠질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교만의 삶과 겸손의 삶을 기억하면서 아래의 글을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1825년 러시아 알렉산드로 1세가 죽은 뒤에,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하자마자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들이 러시아의 근대화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는 황실 근위대인 코작 기병대를 동원해 사흘 마에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주동자 5명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 이때 운 좋게도 콘드라티 릴레예프의 목을 매단 밧줄이 그만 끊어지고 말았다. 시인이었던 그는 벌떡 일어나 군중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이 밧줄을 보라! 러시아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밧줄 하나 제대로 못 만들지 않는가!”

그 당시, 유럽의 다른 나라처럼 러시아에서도 사형장 밧줄이 끊어진 경우, 이를 신의 섭리라 믿고 사면해주는 게 관례였다. 니콜라이 1세도 별수가 없었다. 사면장에 서명을 하다 그가 물었다.

“기적이 일어난 뒤 릴레예프가 뭐라던가.”

신하가 ‘러시아는 밧줄 하나도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고 조롱했다고 전하자, 황제는 화를 내며 사면장을 찢어버렸다.

“그 말이 틀렸음을 증명하도록 하라!”

릴레예프는 다음날 교수대에 다시 섰다. 이번엔 줄이 끊어지지 않았다.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될 때가 있다. 그래서 내키는 대로 내뱉어도 될 거라 생각될 때가 있다. 그때 그 한마디를 조심해야 한다.
 
  2897
작성자 푸른산
작성일 2014-05-08 (목) 08:49
분 류 성경 매일 묵상
ㆍ조회: 1889      
http://hi.djcatholic.or.kr/cafe/?hawaii.9596.4
“ 2014년 5월 8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
2014년 5월 8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I am the living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whoever eats this bread will live forever;
and the bread that I will give is 
my Flesh for the life of the world.
(Jn.6,51)
 
 
제1독서 사도 8,26-40
복음 요한 6,44-51
 

제가 좋아하는 스포츠 중의 하나가 야구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응원을 하던 프로야구의 한 팀이 있습니다. 만약 제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고 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것은 물론, 스포츠 하이라이트까지 보면서 승리에 대한 기쁨을 만끽합니다. 그런데 제가 응원하는 팀이 대패하고 있거나 또는 이기다가 역전을 하게 된다면 괜히 신경질이 나면서 텔레비전 전원을 꺼버립니다. 사실 스포츠 경기라는 것이 이길 때도 있고 또 질 때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응원하는 팀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완벽한 승리란 있을 수가 없지요. 때로는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있어도 질 수 있는 것이 스포츠인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완벽한 인생이란 있을 수 없지요. 때로는 실패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실패라고 해서 그냥 포기하고 좌절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삶 역시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시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품 안에서 우리는 바로 희망을 발견합니다. 특히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빵을 통해 우리들은 커다란 희망 안에서 지금의 고통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빵과 반대되는 죽음의 빵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유혹입니다. 잠언의 말씀처럼 죄는 우리를 이러한 식으로 유혹하지요. 

“훔친 물이 더 달고 몰래 먹는 빵이 더 맛있다.”(잠언 9,17) 

정말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유혹은 달콤하기 때문에, 쉽게 넘어가곤 합니다. 잠시 그 빵을 먹으면서 즐거움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가져다주는 빵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생명의 빵’이신 당신을 받아들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빵을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영하게 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생명의 빵을 모신다는 것은 매 미사 때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이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적게 받았다고 불평불만을 던지는 사람이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 죄를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다면서 심한 자책 속에 빠져 있습니다. 모두 주님의 큰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삶을 살도록 더욱 철저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의 빵이 아닌, 생명의 빵을 모실 수 있는 거룩한 내 몸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으니까요. 

나무는 혼자 서 있어도 나무고, 돌은 혼자 있어도 돌이네. 하지만 인간은 혼자서는 인간이 될 수 없어 관계가 인생이고 존재의 이유인 것이네. 인생의 의미는 관계 속에 있어(레이먼드 조). 



 

바로 나 자신의 모습(「효와 관련하여 요즈음 풍자한 글중에서」)

어버이날인 오늘, 부모님께 대한 우리의 모습을 반성했으면 합니다. 부모님께 효도합시다. 

애완동물 병이나면 가축병원 달려가도
늙은부모 병이나면 그러려니 태연하고

열자식을 키운부모 하나같이 키웠건만
열자식은 한부모를 귀찮스레 여겨지네

자식위해 쓰는돈은 아낌없이 쓰건만은
부모위해 쓰는돈은 하나둘씩 따져보네

자식들은 손을잡고 줄외식을 하건만은
늙은부모 위해서는 외출한번 하지않네

자식들이 장난하면 싱글벙글 웃으면서
부모님이 훈계하면 듣기싫은 표정이네

시끄러운 아이소리 잘한다고 손뼉치며 
부모님의 회심소리 듣기싫어 빈정대네

과자봉지 들고와서 아이손에 쥐어주나
부모위해 고기한번 사올줄을 모르도다.
 
  2896
작성자 푸른산
작성일 2014-05-06 (화) 21:51
분 류 성경 매일 묵상
ㆍ조회: 1837      
http://hi.djcatholic.or.kr/cafe/?hawaii.9579.4
“ 2014년 5월 7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
2014년 5월 7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I came down from heaven not to do my own will
but the will of the one who sent me. 
(Jn.6,38)
 
 
제1독서 사도 8,1ㄴ-8
복음 요한 6,35-40
 

어느 책에서 본 내용이 생각납니다. 어떤 책인지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스승님이 제자들을 불러 몽둥이를 휘두르며 물었지요. 

“이 몽둥이가 있다고 해도 맞을 것이고, 없다고 해도 맞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맞을 것이다. 이 몽둥이는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말해봐라.”

한 제자가 “그런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분명히 몽둥이가 스승님 손에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순간, “있다고 했으니 맞아라.”하면서 무조건 세게 내리칩니다. 이 모습을 본 다른 제자들은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지요. 그러자 스승님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맞아라.”하면서 또 몽둥이를 내리칩니다. 제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지요. ‘있다’, ‘없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맞으니까요.

바로 그 순간 한 제자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웃으면서 말합니다. 

“스승님, 바람이 시원합니다.”

이 제자의 말에 스승님도 웃으시면서 몽둥이를 내려놓으십니다. 다른 제자들은 어안이 벙벙했지요. 그러자 스승님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몽둥이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로 마음을 연다면, 몽둥이세례를 받지 않을 답은 무한하다. 그래서 이 제자는 몽둥이를 이야기하지 않고 ‘바람이 시원하다’라고 말했던 것이지. 하지만 몽둥이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 어떤 답도 할 여유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 어떠한 어려움과 힘듦을 체험하고 계신 분들의 공통점은 그 한 가지에만 머물러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집착에서 벗어날 때 분명히 나를 찾아온 어려움과 힘듦 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그 집착에서 벗어나기가 너무나도 힘들다는 것이지요. 벗어나야지 하면서도 자꾸만 드는 생각에 주저앉게 됩니다. 

바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힘이 바로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빵으로 우리를 모두 살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 우리를 어떻게든 구원하시려고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시는 주님, 큰 사랑을 주시면서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을 느끼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향해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표징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끊임없는 의심으로 거부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렇게 거부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구원자 예수님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주님을 잘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치유되어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된다(오드리 햅번). 



 

무엇이 옳을까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서 저녁식사를 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아저씨께서 오셔서 초콜릿 하나만 사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격을 물어본 뒤에 초콜릿 하나를 샀지요. 아저씨께서는 고맙다고 말씀하신 뒤 다른 가게로 가셨는데, 친구 한 명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 아저씨, 이곳에 매일 오시는 분이야. 그냥 무조건 돈 달라는 식으로 손만 내밀고 있지. 그런데 나는 저런 분을 도와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 충분히 일할 수 있는 몸이잖아. 따라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야 이 방법으로는 되지 않는 것을 깨닫고서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겠어?”

글쎄요. 과연 도와주는 것이 옳을까요? 도와주지 않는 것이 옳을까요? 문제는 돕지 않으면 일차적으로 내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해 차가운 거리에서 쓰러져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무엇이 맞을까요? 여러분들의 의견을 한 번 제시해보시죠?
 
이름아이콘 푸른산
2014-05-06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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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님의 묵상글을 퍼다 나를 때면 참 존경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물론 요즘엔 몇몇 신부님께서 또 이와 같이 좋은 묵상글을 쓰고 계십니다만 겨우 퍼다 나르는 아주 작은 일마저 제게는 때론 부담이 되기도하고 깜박 잊기도 하고... 우여곡절이 많은데 매일 같이 이 글을 쓰시는 일이야 또 얼마나 많은 노력과 인내와 희생이 필요할지...

이제 순례의 길을 떠날 날이 다섯손가락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간 이 묵상글의 게재가 전임 한신부님께서... 또 임신부님꼐서... 계속 이어오던 일이었으나 올해 초 임신부님께서 떠나신 후 몇 달 동안 중지되고 있음이 안타까워 임시로 제 마음대로 글의 게재를 이어보았습니다.
이제 새로오신 보좌신부님이나 또 다른 어느 분께서 이어주시기를 바라며 저는 순례의 길을 떠나는 이번 주말까지만 자리를 지켜보려 합니다. 어차피 두 달가까이 비워두어야하는지라... 누군가가 있어 울 홈페이지의 한 공간만이라도 지켜주시길...
   
 
  2895
작성자 푸른산
작성일 2014-05-06 (화) 21:51
분 류 성경 매일 묵상
ㆍ조회: 1890      
http://hi.djcatholic.or.kr/cafe/?hawaii.9578.4
“ 2014년 5월 6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

2014년 5월 6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I am the bread of life;
whoever comes to me will never hunger,
and whoever believes in me 
will never thirst."

(Jn.6,35)

 

 

 

제1독서 사도 7,51―8,1ㄱ
복음 요한 6,30-35



어렸을 때, 흙을 가지고 많이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모래가 쌓여있는 곳이면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모여서 모래를 가지고 여러 가지 놀이를 했습니다. 모래를 퍼 다가 옆으로 나르는 놀이, 모래에 나뭇가지를 하나 세워 놓고서 쓰러지지 않게 모래를 조금씩 더는 놀이, 조그만 성곽을 만드는 것 등등 부드러운 모래를 가지고서 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했고,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그리고 뙤약볕에서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그냥 모래 있는 곳에서만 놀아야 한다고 명령하면 어떨까요? 과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 수 있을까요? 명령에 의한 놀이는 진정한 놀이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가 전제될 때에만 마음껏 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보지요. 어떤 회사의 사장님께서 오랜만에 등산을 갔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또한 운동도 되면서 모든 스트레스를 내려놓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좋은 것을 자기 혼자만 누려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직원들에게 이야기해서 한 달에 한 번은 의무적으로 주말에 등산을 가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과연 직원들이 기뻐했을까요? 등산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자유가 있지 않은 등산은 그 어떤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은 그렇지 않지요. 사장님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들어있기 때문에 기쁘게 이 규정을 이행할 것입니다. 

자유의지란 이렇게 중요합니다. 자유의지가 억압된 곳에서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만족을 얻기가 힘들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군중은 예수님께 따지듯 묻습니다.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마치 지금까지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것처럼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지요. 게다가 이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선택권이 주님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있는 것처럼, 자기네 조상들에게 내렸던 것과 같은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어쩌면 자신들에게 좋은 것만 알아서 달라는 요청이 아닐까요?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대신 무조건 최고의 것을 알아서 달라는 욕심들, 그러나 과연 최고의 것을 받아도 이것이 최고의 것임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스스로의 주어진 자유의지를 활용하지 못해서 하느님께서 주신 최고의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표징도 필요가 없게 됩니다. 생명의 빵을 매 미사 때마다 받아 모셔도 그 빵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없겠지요.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선물인 자유의지를 가지고 주님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그 많은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지를 깨닫게 될 것이며, 동시에 주님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최고의 분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겠지 생각하고, 나에게는 엄격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반대로 하죠. 다른 사람에겐 엄격하고 자신에겐 관대하잖아요. 관계를 맺을 땐, 상대에게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연이 있을 거라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신영복).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언젠가 어떤 할아버지의 하소연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할아버지께서는 제게 자신의 아내가 빨리 하늘나라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시더군요. 사실 할머니께서 치매와 중풍을 앓고 계시기에, 간호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매일 미사에 함께 손을 잡고 나오시는 등, 사랑을 많이 보여주신 할아버지이시기에 할머니가 빨리 죽을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얼마나 힘드시면 그럴까?’라는 생각도 들었지요.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제게 그런 기도를 부탁하신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암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지요. 즉, 자신이 없으면 누가 자기 아내를 보살피겠냐면서 자신이 끝까지 돌볼 수 있도록 먼저 할머니가 돌아가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생각하게 되더군요. 과연 우리 사회는 이 할아버지가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하는 사회일까요? 자신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회, 그래서 사랑이 넘쳐나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세월호 선박 침몰 참사는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안겼습니다. 선박에서 희생된 많은 영혼들과 그 유가족들, 또한 안타까운 사연에 전 국민이 슬피 울었습니다. “이 나라가 내 자식을 버렸기 때문에 나도 이 나라를 버리겠다.”는 어느 학부모의 절규에 많은 이들이 공감합니다. 왜냐하면 사고가 나면 바꾸는 시늉만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또 다시 참사가 되풀이되는, 이 지독한 악순환의 고리를 더 이상 보기 싫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우리 모두의 힘으로 끊어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만이, 돈 많고 능력 많은 사람에게만 맡기고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외면하는 무관심이 아니라,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모아서 악순환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천교구는 내일(5월 7일 수요일) 오전 10시에 답동 주교좌 성당에서 세월호 침몰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미사가 봉헌됩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하셔서 희생자 영혼을 위로하고, 또 가족들에게는 힘을 북돋아주고,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을 무관심이 아닌 진정한 사랑으로 하나 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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