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ha! 천주교 하와이 한인성당
호놀룰루 교구 마노아, 솔렉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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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하와이성당
작성일 2009-09-17 (목) 17:18
분 류 인사말
ㆍ조회: 1224      
http://hi.djcatholic.or.kr/cafe/?hawaii.1351.1
“ 보편된 교회를 의미하는 로마가톨릭교회 '천주교' ”

[종교기획]보편된 교회를 의미하는

로마가톨릭교회 ‘천주교’


 



한국 천주교회,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힘으로 발전

 

천주교, 즉 로마가톨릭교회(라틴어: Ecclesia Catholica Romana, Roman Catholic Church) 또는 로마 가톨릭은 교황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10억인 이상의 신자가 있는, 기독교의 최대 교파다. 예수 그리스도를 창시자이자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그의 12명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성 베드로가 이끌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한국, 중국, 일본과 같은 한자 문화권에서는 천주교(天主敎), 천주교회(天主敎會)로도 불리며, 조선 후기에는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로마 가톨릭에 대한 정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나온 ‘교회헌장(Lumen Gentium)’에서 볼 수 있는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은 주교단의 단장으로서 그 단원인 주교들과 사도단의 직무를 계승하며 하나요,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하는 표현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종파이다.

 


 

로마가톨릭교회

 


사도(使徒)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교황을 세계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받들고 그 통솔 밑에 있는 그리스도교의 교파로 단순히 가톨릭이라고 할 때에는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 그리스 정교회)까지를 포함해 지칭하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최고의 직위가 로마 교황인 정통 가톨릭교회를 이것과 구별하기 위해 로마가톨릭이라고 한다.

 

‘가톨릭(카톨릭)’이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보편적’이라는 뜻으로 2세기 무렵부터 교회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또 4세기에 이르러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의 두 공의회(公議會)가 그 신앙선언 속에서 ‘가톨릭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이후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은 특정한 개인·인종·시대를 초월한 전체 인류를 위한 것이므로 적합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가톨릭의 교의(敎義)

 

가톨릭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주장하는 점에서, 그 창립자의 사랑의 가르침이 곧 가톨릭의 교의(敎義)이다. 가톨릭의 교의는 성서와 성전(聖傳)에 바탕을 둔다. 성서는 신약과 구약으로 되어 있으며, 성전은 사도시대부터 구전해 내려오는 글로 쓰이지 않은 하느님의 말을 뜻한다.

 

가톨릭교의 교도권(敎導權)은 성서와 성전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을 인류에게 널리 전파하고 권위로써 이것을 해석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가톨릭 신앙은 이 교도권에 복종하는 점에서 프로테스탄트와는 다르다. 가톨릭의 신관(神觀)에서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이라 하며, 이 신관은 4세기 니케아·콘스탄티노플의 두 공의회에서 확립됐다.

 

하느님의 본성은 하나이지만 위격은 셋(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며, 아담의 죄로 하느님의 은총을 잃은 상태를 원죄(原罪)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속죄해 또다시 하느님의 은총을 회복하게 된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중개자가 된다. 또한 그리스도는 성사(聖事)에 의해 그 은혜를 사람들에게 베푼다. 성사는 은혜를 베푸는 의식으로서 일곱 가지가 있다. 즉, ‘성세(聖洗)’ ‘견진(堅振)’ ‘성체(聖體)’ ‘고백(告白)’ ‘혼인(婚姻)’ ‘병자(病者)’ ‘신품(神品)’ 성사이다.

 


 

한국천주교의 발전

 


조선 건국 초부터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을 써온 결과 공리공론(空理空論)의 당쟁만을 일삼는 주자학(朱子學)이 성행했으며, 이 같은 풍조에 싫증을 느낀 일부 학자층에서는 현실적인 학문, 즉 실학(實學)을 내세우게 되었으니 이수광은 바로 그 선구적 인물이었다.

 

실학은 필연적으로 천주교를 믿는 서학(西學)과 결부돼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700년대의 실학자 이익(李瀷)은 그의 문인 안정복(安鼎福) 등과 더불어 천주교를 깊이 연구하게 된다. 그는 특히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 아담 샬의 ‘주제군징(主制群徵)’, 이탈리아 신부 판도자의 ‘칠극(七克)’ 등을 애독하고 이들에 대한 발문(跋文)을 쓰기도 했다.

 

이익과 안정복 사이에 검토된 천주교는 마침내 이들 문인에 의해 이것을 믿는 신봉운동(信奉運動)으로 발전하게 되며, 주동자는 권철신·일신 형제와 정약전·약종·약용의 3형제 등이었다.

 

이들은 교리연구회를 열어 권철신 지도하에 수도생활을 시작했고 권철신의 매부 이벽, 정약전의 매부 이승훈도 참가하게 된다. 특히 이승훈은 교리연구차 베이징으로 건너가 1784년 2월, 귀국에 앞서 예수회 신부 그라몽(梁棟材)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領洗)신자가 됐다. 그는 귀국 후 이벽·권철신 형제에게 대세(代洗)를 주었는데, 이들은 후에 조선교회 창설의 주동인물이 된다.

 

정약전 3형제, 중국어 역관 김범우·최인길, 상인(常人) 출신의 이단원 등 수십 명에게 대세를 주어 1784년 겨울, 역관 김범우 집 대청에서 주일미사를 드리고 최초의 조선천주교회를 설립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한국의 천주교는 박해가 계속되는 형극(荊棘)의 길을 걸어야 했으며, 그러한 박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때까지 계속됐다.

 


 

독립된 교구로 승격

 

1831년 9월 9일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는 두 가지 교서를 발표, 그 하나는 조선교회를 베이징교구로부터 분리, 독립된 교구로 승격시킨다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브뤼기에르(한국성 蘇) 신부를 조선교구 초대 주교에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교회 창설 후 47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소 신부가 조선 입국의 길을 찾다가 1835년 뇌일혈로 급서하자 프랑스의 모방(羅伯多祿) 신부가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입국에 성공했으며, 뒤이어 샤스탕 신부가 입국해 전교에 힘썼다.

 

이때 나 신부는 외방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토착인 성직자 양성에 착안하고 최양업, 최(崔) 프란체스코, 김대건 등 세 소년을 마카오로 보내 로마 인류복음화성성(傳敎聖省) 동양경리부에서 학문을 닦게 했다. 이들은 조선시대에 해외로 보내진 최초의 유학생이었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서양학문을 배운 선각자들이었다.

 


 

한국천주교의 박해

 

천주교는 수용 직후부터 정부의 탄압 대상이 되어 100여 년 동안 10여 회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를 겪어야 했다. 최초의 박해는 1785년 봄 이승훈을 비롯한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 종교집회를 하고 있을 때 관리들에게 검거됨으로써 일어났다(을사추조적발).

 

체포된 신도들 가운데 중인 김범우가 귀양을 가서 희생됨으로써 첫 순교자가 되었다. 1795년의 박해는 주문모 신부의 체포령에서 발단했으며,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박해는 순조(純祖) 즉위와 더불어 시작된 신유박해로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집권층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일대 탄압을 단행하게 되었다.

 

헌종(憲宗) 때 두 번째로 큰 박해가 일어났는데 그것이 1839년의 기해박해이다. 이 박해로 당시 3명의 선교사(앵베르 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가 모두 순교했고, 정하상, 우진길, 조신철 등 교회의 요인들이 많이 순교했다.

 

1846년의 박해(병오박해)는 김대건 신부의 체포가 그 발단이 되었다.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한국 최초의 신부로 서품된 그는 서해안에서 선교사의 입국로를 개척하다가 체포돼 순교했다. 1866년에 시작된 병인박해는 그 후 10년간 계속되면서 병인양요, 남연군묘 두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 신미양요 등으로 더욱 격화됐다. 이 박해에서 재한선교사 12명중 9명이 희생되었고, 8000여 명에 이르는 신도들이 순교하게 된다.

 

한국에서 천주교가 제자리를 찾기까지는 모진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힘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앙을 위해 희생까지도 감수했던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천주교회가 있을 수 있었으며, 1968년에는 100년 전 병인박해에서 순교한 근 1만 명의 신도 중에서 24위에게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복(諡福)함으로써 한국의 복자위(福者位)가 모두 103위가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1983년 9월 로마 교황청은 이들 복자를 다시 성인(聖人)으로 승품시켰고, 84년 5월 로마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서울식전에서 이들 복자위 성인 승품식을 친히 집전하기에 이른다. 이어 1988년에는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는 등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또한 1969년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자랑이자, 평생을 소외된 자들을 위해 헌신해온 고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한편, 한국 천주교회는 현재 124위의 순교자를 복자 대열에 올리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


 

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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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하와이성당
작성일 2009-07-28 (화) 13:38
분 류 인사말
ㆍ조회: 2137      
http://hi.djcatholic.or.kr/cafe/?hawaii.682.1
“ “ 호놀룰루 교구 ” ”
“ 호놀룰루 교구 ”


1941년 1월25일, 교황 비오 12세께서 초기 선교사들이 이룩한 기반위에 은혜로운 호놀룰루 교구를 설립하셨습니다.
호놀룰루 교구는 미국내에서 가장 인종적으로 다양하고 지형적으로 독특한 교구들 중 하나입니다.

오늘날 호놀룰루 교구(교구장: 래리 실바 주교님)는 90여 사제들이 250,000여명의 신자들과 66개 본당 및 26개의 공소에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있습니다.
또한 33개의 가톨릭계 학교, 즉 25개의 초등학교, 7개의 중고등학교, 1개의 대학교가 있는 중요한 교구입니다.

오는 10월 로마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실 다미안 신부님도 이곳 섬들중 하나인 몰로카이에서 나병환우들과 일생을 함께 하셨습니다. 호놀룰루 교구의 자랑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천주교 호놀룰루교구의 한인 성당은 현재 마노아와 솔렉 필로메나 두 곳이고, 카할라 공동체는 공소 개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한 가족 세 지붕인 한인 공동체가 하느님 안에서 선의의 경쟁과 더불어, 한 가족임을 기억하며 서로를 위한 따듯한 격려와 기도를 아끼지 맙시다!

모두의 발전과 하느님이 주시는 행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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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하와이성당
작성일 2009-07-28 (화) 13:37
분 류 인사말
ㆍ조회: 1308      
http://hi.djcatholic.or.kr/cafe/?hawaii.681.1
“ “ 하와이 개요 ” ”
“ 하와이 개요 ”
1. 하와이 역사
하와이 제도는 대륙으로부터 4,000km 떨어진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발생한 화산 폭발로 이루어진 섬들이다. 태풍이나 폭풍 등으로 각종 식물의 씨앗과 새들이 상륙하기 시작해 비로소 생명의 보금자리로 탄생되었다.

기원전 2000년~ 1500년 전 사모아와 통가 등지에 분포되어 살고 있던 폴리네시안들이 그들의 발달된 항해술로 폴리네시아를 탐험하여 정복하기 시작했고 서기 750년경, 하와이 제도도 최초로 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 폴리네시안들은 각종 실과와 동물들 또한 이곳 하와이 제도에 보급시킨 최초의 장본인이다. 초창기의 고대 하와이안들은 뛰어난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가기 시작하며 섬 곳곳을 탐험하고 개발하였으며 250 ~ 300명의 가족 중심의 부족들로 발전하며 사원까지 갖출 정도로 문명을 키워 나갔다.

12 ~ 13세기경, 하와이는 타히티 제도로부터 건너온 강력한 문화에 많은 약소 부족이 사라져 가며 새로운 문화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인구가 늘어나며 이때 들어온 민족은 이미 있던 고대 부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고대 하와이 사회를 형성해 갔다.

1778년,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 처음으로 하와이를 발견하기 이전에도 스페인 함대에 의해 발견된 흔적이 있으나 영국의 막강한 힘 앞에서 제임스 쿡 선장의 발견이 최초로 만들어 졌다는 속설도 있다. 어쨌든 기록으로 1778년 1월18일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하와이를 최초로 발견하였고 샌드위치 섬이라고 명명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하와이 원주민에게 멜론,호박,양파 등의 야채를 섬에 소개 시키며 무역을 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불행히도 임질, 매독과 같은 전염병도 함께 전해져 많은 하와이안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779년 2월경 제임스 쿡 선장은 하와이를 떠나게 되며, 하와이 원주민들은 이에 상당히 기뻐하지만 제임스 일행이 풍랑을 만나 다시 하와이로 돌아오자, 원주민과 이들 일행간에는 마찰과 불신이 생겨 결국 제임스 선장은 원주민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다.

처음 제임스 일행이 하와이를 발견했을 당시만 해도 하와이는 여러 부족이 패권을 다투고 있던 시기였으나 그중에 가장 강력한 부족의 왕의 조카였던 카메하메하는 어린 시절부터 쿡 선장 일행의 배를 견학하고 서양 무기를 보며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추후 왕이 된 카메하메하 왕은 경쟁 부족들을 모두 물리치고 마우이와 몰로카이 섬 등을 점령하고 1795년 오아우 섬을 정복 마우이 섬에 수도를 정하며 하와이 왕국을 세웠다. 이때만 하더라도 카우와이 섬을 제외한 모든 섬이 정복되었고 계속해서 힘을 키워 나간 하와이 왕국에 카우와이 부족도 항복, 마침내 1810년에는 모든 섬과 부족을 통일시켰다.

카메하메하 왕은 계속해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며 힘을 키워 나갔으나 하와이 신을 섬기고 풍습을 지켜 원주민에게 늘 추앙 받는 왕이었다. 1819년 그가 죽을 때까지 하와이 왕국은 태평양에서 가장 독립적이고 평화로운 섬으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강하고 위대한 왕이 세상을 떠나자 카메하메하 2세가 통치하기 시작했으나 강력하게 왕국을 이끌어 나가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점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왕비인 카아후마루가 그의 후견인이 되어 실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1820년 보스턴으로부터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전파하고 영어로 교육을 시키기 시작해 영어는 새로운 학습 문자가 되기 시작했으며 카아후마루 왕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와이 문화는 기독교 문화와 섞이게 되며 하와이 왕국의 사상에 기독교 사상이 뿌리깊게 박히기 시작했다.

카메하메하 2세의 사망으로 왕위를 계승한 그의 동생은 비록 나이가 어려 친척에 의한 섭정기를 보냈지만 하와이 왕조 역사상 가장 튼튼한 30년의 왕조기를 보낼 수 있었다. 국가 체제를 정비하며 1850년에는 수도를 지금의 오아후 호놀룰루로 옮겼다. 이때부터 제일 산업이었던 고래잡이가 퇴조하며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하며 하와이의 경제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카메하메하 4세 왕위는 자식이 없는 3세의 사망으로 그의 조카가 승계했다. 이때부터 경제적인 붐을 이루기 시작하며 무역업 등이 성행하게 되었다. 미국보다는 영국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되었으며 그의 아내 퀸 엠마와 더불어 퀸스 병원을 설립해 주민들의 건강 증진에도 힘을 쏟았다. 4세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카메하메하 5세로 그의 형을 지명했다.

카메하메하 5세는 찬란했던 선조대의 왕권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주민들에게도 세심한 정책을 펼쳤다. 사탕수수 산업을 더욱 더 증진시켜 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 일본, 푸에트리코, 한국, 필리핀 등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하와이에 들어왔고 많은 중국인들이 하와이안들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왕권이 점점 약해지고 반대파들에 의한 난정으로 인해 카메하메하 5세는 점차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후손 또한 없어 결국 왕위 계승에 실패해 카메하메하 왕조는 결국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새로운 왕조는 왕실의회에 의해 선출되었고 루날릴로가 6대 왕으로 즉위한다.
5대에 이어 6대 왕도 지방 하와이안 세력과의 잦은 충돌과 더불어 더욱 더 기울기 시작하였다. 결국 원주민과의 마찰로 그리고 건강 악화로 7대왕 칼라카우아 왕이 왕권을 계승한다.

매우 재능 있고 똑똑하였던 칼라카우아는 하와이 전통 문화 복원에 최선을 다하여 훌라댄스를 부활시키기도 하였다. 미국과 경제적 이익을 위해 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로 인해 미국과는 관세가 철폐되며 미국의 많은 자본가들이 들어오며 그 세력을 넓혀갔다. 영국 방문중 영국 왕실의 대관식에 감명을 받아 1879년부터 1882년까지 이올라니 궁전을 완공해 대관식을 열기도 했지만 이는 하와이 왕국의 힘을 너무 약하게 만들만큼 낭비가 컸다.

7대왕인 칼라카우아 왕이 죽자 그의 여동생인 릴리우 칼라니가 여왕으로 즉위했다. 백인들로부터 하와이 원주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반대파들에게 의해 결국 궁전을 봉쇄 당하고 퇴위하게 된다. 이로써 하와이 100년 왕국의 왕조가 그 막을 내렸다.

1894년 7월4일 임시 정부에 의해 하와이 공화국이 탄생하였고 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898년에 하와이와 미국의 합병이 미국의회에서 승인이 되어 하와이는 미국령이 되었다. 이때의 도지사는 공화국 시절의 대통령인 돌이 맡게 되었고 그의 사촌과 함께 파인애플 통조림 제조 및 수출에 성공하면서 파인애플 또한 사탕수수와 함께 하와이의 주요 산업이 된다.

1941년 진주만의 일본 공격 등의 큰 사건을 겪으며 하와이는 1945년 미국 연방에 편입되고 이어 1959년 의회에서 50번째 주로 승격된다.


▶ 2. 하와이 기후
호놀룰루 기준 북위 21도로 북회귀선 남쪽에 위치하는 하와이는 열대 기후에 속한다. 하지만 하와이는 일반적으로 열대 기후하면 떠오르는 덥고 습하며 정글과 밀림으로 뒤덮인 기후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분명히 태양은 한국보다 몇 배 강렬하게 느껴지지만 연중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무역풍과 베링해의 한류 덕분에 습도가 적고 선선하여 지상 낙원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는 기후이다.

연중 최고 기온이 약 섭씨 32도 정도, 최저 기온이 14도 정도이며 연 평균 기온은 24.4도 정도이다. 엄연히 여름과 겨울이 존재하며 여름(건기)은 4월에서 10월, 겨울(우기)은 11월에서 3월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

겨울은 우기로 비가 다소 많이 내리는 편이지만 비가 오더라도 소나기로 한바탕 내리고 멈추는 게 대부분이다. 덕분에 무지개를 자주 볼 수 있다.
호놀룰루는 연 평균 65% 정도의 맑은 날을 기록한다.


▶ 3. 하와이 경제
하와이 경제는 관광, 농업(사탕수수, 파인애플), 국방이 3대 수입원이다.
관광객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지만 주 관광객이 아시아 외환 위기 사태 이후 일본인을 위시한 아시안에서 미 본토인과 유럽으로 바뀌고 있다.

사탕수수와 파인애플은 많은 경제적 수익을 올렸으나 인건비 상승 등으로 인한 채산성 악화로 점점 사라지는 반면 파파야나 마카데미아넛, 코나 커피와 같은 대체 작물의 생산이 꾸준히 늘고 있다.

또한 하와이에는 미국 태평양 함대 기지가 있는 관계로 관광 수익에 맞먹는 금액의 돈이 연방 정부로부터 지원되고 있다.


▶ 4. 하와이 사회
하와이 인종은 인종 차별이 거의 없는 다양한 인종의 혼합 다 인종 사회로 하와이안 혼혈계 약 20%, 백인 약25%, 일본계 약23%, 필리핀계 약12%, 중국계 약6%, 한국계 약3%등이 살고 있으며 약 11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하와이 순수 혈통은 1%로 안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만큼 그 종교도 다양하나 기독교 왕국이었던 하와이 왕조의 영향으로 가톨릭, 개신교가 많고 몰몬교, 불교 등의 순으로 구성된다. 최대 종교는 가톨릭으로 20%를 넘는다.

하와이 언어는 단연 영어이다. 하와이도 미국의 50번째 주가 아닌가? 그러나 아직도 곳곳에선 하와이안 단어를 쉽게 접할 수 있고 관광객 등의 영향으로 와이키키 지역에는 일본말도 많이 통용되고 있다.

하와이 교육은 한국과 같이 초.중.고 교육이 6.3.3제로 되어 있고 의무 교육이다. 대학은 하와이 주립 대학과 5개의 사립 대학이 있다.

5. 오바마, 새로운 하와이 스타

최근에는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덕분에 하와이가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의 부인 미셸 오바마는 “버락 오바마를 알려면 하와이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바마가 즐겨 찾던 여행지를 중심으로 한 여행 상품도 나왔으며 하와이관광청에서도 이를 추천일정으로 웹사이트(www.gohawaii.com/obama)에 게재해 놓기도 했다. 옷가게를 비롯한 각종 상점에는 어딜 가나 ‘상품화된 오바마’가 판매(?)되고 있어 하와이에서만큼은 최고 스타임을 증명하고 있다. 나아가 흑인임에도 다양한 인종으로부터 인기를 얻고 다양성을 적극 포용하는 그의 삶을 보고 알로하 정신(Aloha spirit)이 재조명 받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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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하와이성당
작성일 2009-07-11 (토) 18:09
분 류 인사말
ㆍ조회: 936      
http://hi.djcatholic.or.kr/cafe/?hawaii.393.1
“ 천주교 소개 ”

                      자료 출처 : http://www.cbck.or.kr/catholic/dogma/introduce/index.htm


  1. 천주교의 유래
  천주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로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던 제자들인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법통을 오늘날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서기 30년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초기 그리스도교는 사도들의 열성적인 선교 활동으로 시리아, 그리스, 로마 등지로 신속하게 퍼져 나갔습니다. 천주교는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의 통치자들에게 300여 년 가까이 혹독한 박해를 받았지만, 굳건하게 신앙을 지켜 마침내 313년 신앙의 자유를 얻었고, 곧이어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천주교는 지난 이천 년 동안 서구 문화와 문명의 정신적, 사상적 토대가 되어 왔으며, 학문과 예술에도 지대한 공헌을 해 왔습니다. 또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하면서 세계 평화와 인류애 증진을 위하여 크게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에는 약 11억 명(2005년 말 통계)의 천주교 신자들이 같은 믿음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2. 천주교의 한국 전래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때는 지금부터 200여 년 전입니다.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따르면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프랑스 사람 그라몽(Gram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왔을 때부터 본격적인 신자들의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서학(西學)을 연구하던 학자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승훈은 귀국하자마자 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드디어 지금의 명동 성당 부근의 명례방에서 정기적인 신앙 집회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외국인 선교사가 천주교를 우리나라에 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는 세계 교회사에서 유일한 일입니다.

  3. 천주교의 새로운 가르침
  천주교가 들어올 당시에 우리 나라는 국가와 사회의 이념적 근본을 유교에 두고 있었습니다. 유교 사상과 그 실천은 사회 생활과 가정 생활의 바탕이었습니다. 따라서 유교에 회의를 품는다는 것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사회적으로 파멸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실학파 학자들은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서적과 함께 접하게 된 새로운 종교, 곧 천주교의 가르침에 빠져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행적으로 인간에게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셨는데, 사랑과 평등과 자유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이 가르침은 당시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만인은 평등하고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한 형제이며 자매라는 가르침은 양반과 천민, 남자와 여자라는 엄격한 신분 차별이 있던 사회에서 참으로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4. 온갖 박해를 딛고 성장한 한국 천주교회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유교 사상에 젖어 있던 당시의 지배층은 천주교 신자들을 동양 윤리의 이단자이며, 모든 악의 전형으로 몰아 온갖 박해를 하였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여 년 동안 네 번에 걸친 커다란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선교사 영입과 성직자 배출을 위하여 힘쓰던 당시 조선 천주교회는, 1845년 김대건(안드레아)이 중국 상하이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받음으로써 최초의 조선인 사제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는 귀국하여 일 년도 채 안 된 이듬해에 체포되어 순교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우리 민족과 함께 나누기 위하여 혹독한 박해를 견디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배교(背敎)하겠다.”라는 한 마디만 하면 단란했던 가정, 잃었던 명예와 가산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고백했던 많은 순교자들 가운데 이미 103명은 전세계의 천주교 신자들이 함께 공경하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5.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
  오늘날에도 한국 천주교회는 이런 모습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복음 선교 활동은 물론이려니와 여러 가지 사회 복지 활동, 사회 정의 수호와 인권 옹호 활동 등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드러내고, 그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천주교 신자들은 500만 명(2008년 말 통계)이라는 대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봉사하고, 남북 통일을 위하여 기도하고, 북한 형제들과 나눔을 실천하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6. 성당은 하느님의 집
  성당은 하느님의 집이고, 신자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기도와 수련의 집으로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곳입니다. 성당에 들어갈 때 신자들은 손에 성수(聖水)를 찍어 성호경을 바치면서, 생각과 행동이 오직 하느님께 향할 수 있도록 마음을 깨끗이 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성당의 중심은 천주교의 공적 예배인 미사가 봉헌되는 제대(祭臺)입니다. 제대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에 신자들은 제대 앞에서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성당 안에 빨간 등이 켜져 있는 감실(龕室)은 신자들이 미사 때에 받아 모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몸, 곧 성체를 모셔 놓은 곳입니다.

  7. 전례는 하느님께 드리는 공적 예배
  미사를 비롯하여 천주교의 공식적인 경신례(敬神禮)를 전례(典禮)라고 합니다. 전례는 교회 공동체가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공적 예배를 뜻합니다. 전례를 통하여 신자들은 하느님을 공적으로 흠숭하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며,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거룩하게 됩니다. 또한 신자들은 형제적 사랑을 나누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룹니다.
천주교의 대표적 전례인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써 바치신 제사를 기념하고 재현하는 것이며, 그분 안에서 우리가 한 형제를 이루는 거룩한 잔치입니다. 신자들은 주일(일요일)마다, 그리고 교회가 정한 특별한 날에 미사에 참여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당에서는 토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시간을 정하여 여러 차례 미사를 드리는데, 신자들은 편리한 시간을 택하여 미사에 참석하게 됩니다. 미사에서 신자들은 주님께 최고의 경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예의를 갖추면서 주님을 대하기 위하여 일어서고, 편안하게 주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하여 앉는데, 이는 우리의 생활 관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8. 교구와 본당
  교회 역시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도(道) 단위 지방 자치 단체와도 같은 커다란 지역을 일컬어 교구(敎區)라고 부르는데, 이는 교황이 임명한 교구장 주교를 중심으로 신자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교회의 행정 구역을 말합니다. 교구는 좀더 작은 신자 공동체인 본당(本堂)으로 나뉘는데, 주교들의 협조자인 신부들이 상주하며 신자들을 보살핍니다. 본당에서는 신자들의 효과적인 신앙 생활을 돕기 위하여 가까운 이웃의 몇몇 가구가 모여 구성하는 작은 공동체 모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누구나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교구와 본당에 소속되어 신앙 생활을 합니다. 본당을 중심으로 신자들은, 앞에서 본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처럼, 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고 형제적 사랑으로 나눔을 실천하며 세상에 나아가 선교 사명을 수행합니다. 그러므로 본당은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 생활 터전입니다. 본당에는 신자들의 신앙 생활 지도를 책임지고 있는 주임 신부가 상주하고 있으며, 전교 수녀와 사무실 직원들이 협력하고 있습니다.

   9. 예비신자
  세례를 받으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을 ‘예비신자’라고 부릅니다. 예비신자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존 신자들과 하나가 될 형제 자매들입니다. 예비신자들은 신자들이 누리는 영적 혜택들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천주교의 공식 경신례인 미사에는 물론, 여러 가지 기도 모임과 소공동체 모임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비신자의 장례 역시 세례 받은 신자와 똑같이 이루어집니다. 한편 예비신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생기는 신앙 문제에 대하여 상담할 수 있으며, 집안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신부나 수녀에게 기도를 청할 수 있습니다.
 
  10. 형제애로 보살펴 주는 교회 공동체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정 안에서 부모의 사랑과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나고 성장하기 위해서도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신자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합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거룩해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자들은 본당과 소공동체를 중심으로 모여 하느님을 같은 아버지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들면서 형제적 사랑을 나누며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형제애는 굳건한 신앙 생활과 친교의 바탕이 됩니다. 예비신자들도 이러한 형제애를 나눌 수 있는 교회 공동체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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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하와이성당
작성일 2009-06-11 (목) 17:53
분 류 인사말
ㆍ조회: 1070      
http://hi.djcatholic.or.kr/cafe/?hawaii.147.1
“ 가톨릭(천주교) 신자가 되려면 ”


가톨릭(천주교) 신자가 되시려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으려면 천주교의 교리와 교회 생활에 대하여 소정의 교육을 받아야 하며, 세례 후에는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로서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맡겨 주신 사명을 다하며 생활하게 됩니다. 신자가 되기 위한 이 교육을 '예비신자 교리'라고 하며, 각 성당(본당)에서는 신부님, 수녀님, 교리교사들이 가르치고 있으며 교육기간은 대략 6개월 정도입니다.

천주교 신자는 누구나 성당(천주교의 일정한 신자 공동체로서 신부님이 상주하며 신자들을 보살피는 지역)에 소속되며, 따라서 천주교에 입교하시려면 자기가 거주하는 곳을 관할하는 성당(본당)에 먼저 찾아가시면 됩니다. 각 성당(본당) 사무실에 가시면 입교 및 '예비신자 교리'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받으실 수 있읍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성당에서 '예비신자 교리'를 받기 어려우신 분은  
 '통신 교리' 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먼저 성당을 방문해 주시거나 연락주시면 도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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